
서울숲에서 정원과 보내는 하루, 2026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서울숲은 굳이 이유를 만들지 않아도 걷게 되는 곳이다. 철마다 빛이 바뀌는 나무들, 꽃사슴이 사는 숲과 갈대 우거진 연못, 강으로 이어지는 둔치까지, 누가 새로 가꾸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푸르다. 서울 한복판에 이만한 숲이 있다는 게 새삼스러울 만큼, 오래 거기 있어 온 자리다.
그 익숙한 숲에 올해는 정원이 더해진다. 지난해 보라매공원을 물들였던 박람회가 이 숲으로 자리를 옮겨 왔다. 오월부터 가을까지, 작가들이 지은 크고 작은 정원이 산책로 사이사이에 들어선다. 원래도 푸르던 곳이라 뭐가 달라졌나 싶다가도, 늘 지나치던 잔디밭과 나무 그늘 사이로 못 보던 색과 모양이 끼어든 걸 금세 알아챈다. 그 색을 좇아, 오월의 토요일에 다시 숲으로 향한다.
물 위에 포개진 숲
수인분당선 서울숲역에서 나오면 성수동의 붉은 벽돌 거리가 곧장 초록으로 바뀐다. 도시가 끝나는 자리부터 사람으로 북적인다.
숲으로 드는 길목에서 노란 밀짚모자를 쓴 해치가 사람들을 맞는다. 서울의 마스코트가 올해는 정원지기다.
걸음을 인파에 맡겨 안으로 드는데, 길 양옆으로 처음 보는 화단과 구조물이 끼어들어 눈이 자꾸 옆으로 샌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서울숲 거울연못 앞이다.
바람이 자는 날이면 수면이 잔잔해져, 곧게 솟은 나무와 끝의 정자가 물 위에 고스란히 뒤집혀 앉는다. 위아래로 포개진 그 풍경 앞에 다들 잠시 멈춰 서는데, 바람이 한 줄기 지나면 거울이 잘게 일렁였다가 이내 다시 맞춰진다. 그 잠깐을 노려, 사람들은 연못가에 쪼그려 앉아 같은 화면을 몇 번이고 고쳐 담는다.
잔디마당에 펼쳐 둔 한낮
연못을 끼고 돌면 너른 잔디마당이 열린다. 멀리서부터 웅성거림이 번지는, 하루 중 가장 붐비는 자리다. 마당 한쪽에는 해치와 친구들을 모아 둔 포토존이 있다. 분홍과 민트, 연보라로 둥글둥글한 캐릭터들 사이로 서울을 알리는 표어가 큼직하게 섰고, 그 앞에서 사람들이 번갈아 카메라를 든다.
포토존을 등지면 잔디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워낙 넓고 잘 손본 잔디라 자리를 펴고 앉기에 모자람이 없다. 돗자리를 깔고 누운 한 쌍, 천막 그늘에 둘러앉은 무리, 아이를 따라 뛰는 어른까지 잔디 위에서 한낮을 보낸다. 그중에는 박람회를 보러 온 이도, 그저 주말 피크닉을 나왔다가 정원을 덤으로 만난 이도 섞여 있다. 서울숲은 원래도 자리 펴고 쉬기 좋은 곳이니까.
잔디밭에는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사람이 많다. 목줄을 풀 수 없으니 곁에 바짝 붙여 두고, 물그릇을 챙기고 간식을 떼어 주며 한나절을 함께 보낸다. 잔디가 신기해 연신 코를 박는 강아지가 있는가 하면, 더위에 지쳐 주인 무릎에 기댄 강아지도 있다. 낯선 강아지끼리 코를 맞대면, 줄을 쥔 두 사람도 덩달아 멋쩍은 눈인사를 나눈다. 개를 사이에 두고 모르던 사이가 잠깐 트이는 자리다.
꽃과 정원이 주인공인 행사인데, 정작 가장 다정한 장면은 이런 잔디 한쪽에서 난다. 멀리서 보러 온 정원보다, 발치에서 꼬리를 흔드는 작은 것 하나가 사람을 더 오래 붙든다.
잔디마당을 빙 두른 가장자리로는 올해 새로 들어선 정원들이 한 자리씩 이어진다. 기업과 기관이 공들여 꾸민 자리들이라 모양도 색도 가지가지인데, 새빨간 격자를 높이 세운 한 곳이 온통 초록인 숲에서 멀리서도 환히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다가가 어두운 나뭇가지 사이로 들여다보니, 격자 안쪽 벤치에 사람들이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다. 정원이 꼭 눈으로만 보는 자리는 아니어서, 이렇게 그늘을 드리워 지친 다리를 앉히기도 한다. 한참을 걸어 다리가 뻐근해질 즈음이면, 마침맞은 그늘 하나가 더없이 반갑다.
분수 뒤로 선 도심
잔디마당을 벗어나면 물소리가 먼저 들려온다. 나무 높이만큼 솟구치는 분수를 따라 걸으면 중앙연못이다. 갈대가 둘러선 못 위로 물줄기가 부채처럼 펼쳐지고, 그 앞 그늘에 사람들이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더운 날 물이 퍼지는 소리만으로도 한결 시원해져서, 굳이 정원을 찾지 않아도 발이 멎는 자리다.
못은 생각보다 넓다. 한 줄기로 곧게 솟은 분수 뒤로 푸른 나무가 못을 빙 두르고, 그 너머 멀리 도심의 높은 건물들이 어렴풋이 선다. 숲과 물과 빌딩이 한 화면에 겹치는 풍경은 서울 한복판의 공원에서만 나오는 그림이다. 정원에 들어와 있다는 것도 잠시 잊었다가, 나무 위로 솟은 빌딩을 보고서야 여기가 도시 한가운데임을 떠올린다.
물가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분수를 등진 자리, 갈대가 트인 모퉁이, 물그림자가 비치는 데크. 배경이 될 만한 곳마다 짧은 줄이 서는데, 마침 흰 드레스라도 차려입고 나온 사람이 그 끝에 서면 초록과 물 사이로 모습이 환히 떠오른다.
조각정원을 지나
중심부를 빠져나와 숲의 둘레를 따라 걷는다. 사람으로 북적이던 마당과 달리 바깥 산책로는 한결 한산하고 그늘이 깊다. 그렇게 얼마쯤 걷다 보면 길이 서울숲 조각정원으로 이어진다. 보랏빛 알리움이 어른 허리께까지 줄기를 밀어 올려, 그 끝마다 둥근 꽃을 공처럼 매달았다. 군락 사이에는 빨간 사람 모양 조각 하나가 우두커니 섰다. 보랏빛 꽃과 초록 잎 사이에서 그 빨강이 단번에 튀어, 꽃을 보러 온 눈길이 한 번씩 그 앞에 붙들린다.
조각정원을 나와 다시 둘레길을 걷는다. 길을 따라 이름 모를 꽃이 색색으로 번갈아 핀다. 백합만 해도 흰 것, 분홍 것이 한데 섞였는데, 그 가운데 빛을 가득 머금은 주황 백합 앞에서 발이 묶인다. 뒤로 말린 꽃잎 사이로 수술이 길게 뻗어, 초록 그늘을 등진 그 한 송이가 볕을 통째로 빨아들인 듯 환하다.
들꽃으로 깔린 런웨이
나무 사이로 무언가 반짝이는 걸 따라 들어가면 길이 통째로 바뀐다. 디올이 꾸민 정원이다. 청록빛 철제 아치가 길게 이어진 보행로 아래를 천천히 걸으면, 파리의 그랑 팔레를 닮았다는 그 길에서 잠깐 런웨이를 지나는 기분이 든다.
발밑을 보면 정작 화려한 꽃은 없다. 명품의 이름값을 기대한 눈에 들어오는 건 소박한 들꽃이다. 디올의 고향 그랑빌의 정원을 이 숲으로 옮겨 심었다는데, 한껏 차려입은 아치 아래 가장 수수한 꽃이 깔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치를 올려다보며 들어왔다가, 발밑을 내려다보며 빠져나간다.
아치를 지나서도 디올의 정원은 이어진다. 잎 그늘이 짙어 한낮에도 어둑한 안쪽 길에, 나뭇가지마다 뾰족한 흰 별이 매달려 점점이 빛을 머금는다. 꽃으로 환하던 입구와 달리, 안쪽은 빛이 꽃을 대신한다.
하나를 가까이 들여다보면, 반투명한 살들이 모여 둥근 빛 덩어리를 이루고 초록 잎과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그 하나가 보석처럼 또렷하다. 멀리서는 무리로 반짝이던 빛이, 다가설수록 하나하나 다른 결로 나뉜다.
정원을 빠져나오는 모퉁이에는 나무 살을 엮어 짠 등불 기둥이 섰다. 격자 틈으로 안의 빛이 따뜻하게 새어 나와 푸른 그늘과 어우러진다. 해가 지면 한꺼번에 살아날 빛인데, 한낮에 지나는 걸음은 그 저녁을 잠깐 그려만 보고 지난다.
정원마다 숨은 친구들
디올의 정원을 나와 다시 길을 잡으면, 이번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자리가 나온다. 무슨 일인가 다가가 보니, 사람보다 큰 라이언이 정원 한가운데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빨간 장미 한 송이를 입에 물고 있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다리를 길게 뻗은 폼이, 능청스럽기가 그지없다. 꽃이며 정원이며 다 제쳐 두고, 그 노란 얼굴 하나를 카메라에 담겠다고 늘어선 행렬이다. 제 차례가 오면 옆에 바짝 붙어 한 장을 남기고서야, 풀어진 얼굴로 자리를 뜬다.
조금 더 걸으면 또 다른 정원에 또 다른 얼굴이 숨어 있다. 이번에는 크림빛 담비 한 마리가 빨간 하트를 끌어안고 벤치에 앉았다. 도담이라는 이름의 이 친구는 사라져 가는 멸종 위기종을 본떴다는데, 하트를 안은 모양새에는 그런 사연이 무색하게 시름 한 점 없다. 무거운 이야기를 깜찍한 얼굴에 실어 보내는 것이, 이런 정원들이 일하는 방식이다.
또 한 곳에서는 덩굴이 지붕까지 뒤덮은 오두막 앞에서 걸음이 멎는다. 비뚜름하게 솟은 박공지붕으로 초록이 흘러내리고, 문 옆에는 보라 붓꽃이 피었다. 동화 속 마녀가 살 법한 집이다. 파란 옷을 입은 아이가 망설임 없이 열린 문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그 작은 등을 보고 있으면 안쪽에 정말 다른 세계로 드는 길이 숨어 있을 것만 같다.
물론 이런 정원만 있는 건 아니다. 돌을 쌓아 옛 마당을 들인 곳이 있는가 하면, 키 큰 풀과 들꽃만으로 한 폭을 채운 곳도 있다. 나라 밖에서 건너온 정원도, 학생들이 손수 가꾼 작은 화단도 한 자리씩 차지한다. 깜찍한 캐릭터에 눈이 팔려 걷다가도 문득 고개를 들면, 결국 사방은 온통 정원이고 꽃이다.
마침 같은 철, 숲 한쪽 은행나무길에는 서른 해를 맞은 포켓몬의 비밀의 숲이 숨어 있어서, 올봄의 서울숲은 어느 길로 걸어도 낯익은 얼굴과 마주친다.
해가 저무는 정원
한참을 걷고, 앉고, 들여다보다 보면 어느새 해가 기운다. 들어올 때 머리 위에 있던 볕이 나무 사이로 길게 누우면서 잔디와 길이 황금빛으로 물든다. 나가는 길목의 바닥분수 광장에는 서울국제정원박람회라는 이름을 큼직하게 세운 글자 조형물이 섰는데, 하루 내내 사진을 찍던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 앞에 선다. 다녀간 자리를 남기려는 손들 사이로 아이들이 물줄기를 뛰어다니고, 글자 위로 노을이 내려앉아 빛깔이 한층 짙어진다. 종일 북적이던 숲이 저녁빛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는다.
하루에 다 보기에는 정원이 너무 많다. 걷는 내내 빠뜨린 길이 자꾸 생겨서, 커다란 안내 지도 앞에는 해가 기운 뒤에도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오늘 미처 못 가 본 길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는 얼굴들이다.
한 번에 다 보지 못한다는 게 아쉬운 일만은 아니다. 봄에 핀 정원과 가을에 물든 정원이 다를 테니, 한 철에 한 번씩 다시 와서 나눠 보아도 좋다. 정원이 언제까지 이 숲에 머물지는 알 수 없어도, 숲은 늘 그 자리에 있다. 어차피 서울숲은, 굳이 이유를 만들지 않아도 걷게 되는 곳이니까.
찾아가기
네이버 지도에서 열기- 행사기간: 2026년 5월 1일 ~ 2026년 10월 27일
- 교통: 수인분당선 서울숲역에서 도보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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