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암 하늘공원, 한여름의 초록 억새밭
비가 며칠이나 이어졌다. 아침에 잠깐 그치기는 했지만 하늘이 갠 것은 아니어서, 구름만 위쪽으로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다. 오후에 한 번 더 온다고 예보는 말했다. 그 말을 절반쯤 믿고 우산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며칠 비를 들이켠 초록이 일 년 중 가장 짙어지는 것이 이맘때다. 그런 날에는 결국 초록을 보러 가게 된다. 되도록 짙고, 오래 걸어도 좀처럼 끝나지 않는 초록. 상암 하늘공원으로 갔다. 한강을 옆에 낀 야트막한 언덕인데, 가을이 되면 능선이 통째로 은빛으로 눕는다고 해서 이름이 난 곳이다. 다만 그 은빛은 가을에나 오는 것이었다. 일요일 낮인데도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억새를 보러 오는 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언덕은 처음부터 언덕이었던 적이 없다. 난지도라고 불리던 때에는 섬이었다. 오래전 도시가 날마다 내다 버린 것들이 이 자리에 쌓이고 또 쌓여 산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높이가 되었고, 그 위에 흙을 덮고 씨를 뿌린 것이 이십몇 해 전이다. 무엇이 얼마나 깊이 묻혀 있는지는 올라가 봐도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채로 사람들이 그 위를 걷고, 그늘을 찾아 앉고, 사진을 찍는다.
초입에서 숲까지
출구 계단을 다 올라서기도 전에 더운 공기가 얼굴로 내려왔다. 지하에서 식어 있던 몸이 몇 걸음 만에 도로 데워졌고, 셔츠 등판이 축축해지는 데는 그보다 조금 더 걸렸다. 인도에는 그늘이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고, 아스팔트에 고여 있던 열이 종아리께로 올라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개 걸치고 있던 것을 벗어 팔에 걸고 있었다. 그늘에 자전거를 세운 사람은 헬멧을 벗어 핸들에 걸고 저지 지퍼를 끝까지 내렸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언덕으로 드는 길목에 배롱나무 한 그루가 붉게 피어 있었다. 볕에 씻긴 하늘을 뒤에 두고 혼자만 붉었다. 백일홍이라는 다른 이름은 백 일 동안 핀다고 해서 붙었다는데, 백 일을 정확히 세어 본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여름내 피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들 더위에 잎을 늘어뜨리는 철에 혼자 꽃을 밀어 올리는 나무라, 마른 볕 아래에서는 이쪽이 오히려 제철로 보였다. 매미 소리가 사방을 한 겹 덮고 있었다. 소리라기보다 공기의 두께에 가까웠다.
몇 걸음 더 들어가자 길가에 고양이 한 마리가 널브러져 있었다. 경계석에 머리를 기대고 옆으로 벌러덩 누워 하얀 배를 그대로 내놓은 자세였다. 곁에 다가서자 눈꺼풀이 실낱만큼 열렸다. 확인은 그것으로 충분했는지 곧 도로 닫혔고, 이어 몸을 크게 뒤척여 반대쪽으로 뒹굴었다. 배는 아까보다 더 넓게 드러났다.
배를 내놓고 자는 것은 아무 데서나 되는 일이 아니다. 적어도 이 길에서는 여태 나쁜 손을 만난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 태평한 얼굴이 마음에 들어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지켜보았다. 무릎이 저릴 때까지 그러고 있었는데도 고양이는 끝내 다시 눈을 뜨지 않았고, 결국 먼저 일어선 쪽은 이쪽이었다. 시간이 남아도는 쪽은 아무래도 고양이였다.
곧게 뻗은 메타세쿼이아 길
꼭대기로 오르는 길은 여럿이다. 전동차를 타도 되고, 포장길을 굽이굽이 돌아도 되고, 철계단으로 곧장 올라도 된다. 어느 쪽이든 결국 같은 자리에 닿는다. 다만 여름 볕이 가장 센 시간이어서, 오르는 일은 뒤로 미루고 볕이 좀 누그러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기에는 메타세쿼이아 숲이 알맞았다.
강을 따라 낮게 앉은 이 일대에는 메타세쿼이아를 두 줄로 심어 놓은 길이 몇 갈래나 곧게 뻗어 있다. 뙤약볕 아래에서는 셔츠가 등에 들러붙고 눈이 자꾸 가늘어졌는데, 나무 사이로 두어 걸음 들어서자 우선 눈이 편해졌다. 더위가 가신 것은 아니었다. 등은 그대로 젖어 있었고, 아침까지 내린 비가 아직 이 아래에 남아 공기는 오히려 더 축축했다. 볕이 살갗에 직접 닿지 않는다는 것뿐인데 그것만으로 한결 견딜 만해졌다. 정확히는 견딜 만해졌다기보다 견딜 만해진 기분이 든 것이었지만, 한여름에는 그 정도 차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머리 위에서 잎이 볕을 거의 다 걸러 냈고, 걸러지고 남은 것만 바닥에 잘게 떨어져 걸을 때마다 그 얼룩이 신발 등을 지나갔다.
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이 길은 서두르지 않아도 될 만큼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늘이 한참 이어지다 저 끝에서 한 번에 트였다. 빛은 거기 고여 있을 뿐 이쪽으로 나아오지 않았다. 어두운 데를 걸으면 눈이 밝은 쪽으로 끌린다. 몇 걸음을 옮겨도 그 거리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문 밑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 같은 것이었다. 흙이 물러 발소리가 나지 않았고, 그래서 매미 우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목을 젖혀 위를 보았다. 줄기들이 올라갈수록 좁아지다 초록 속에 묻혔고, 잔잎 사이로 부서진 빛만 잘게 내려왔다. 그대로 서 있으니 목덜미가 뻐근해졌는데, 고개를 내리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메타세쿼이아는 잎이 묘하다. 하나를 눈으로 좇으면 가는 갈래가 다시 더 가는 갈래로 나뉘어서, 어디까지가 한 장인지 끝내 가늠이 되지 않는다. 낮게 드리운 가지 하나가 마침 눈높이에 있길래 손끝을 대 보았다. 잔잎이 부드럽게 눌렸다가 도로 폈다. 잎에도 물기가 남아 손끝이 잠깐 서늘했다. 이 나무가 오래도록 화석으로만 알려져 있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멸종한 것으로 치고 도감에 실어 두었는데, 어느 산골짜기에서 살아 있는 것이 나왔다고 했다. 그런 사정을 알고 보든 모르고 보든 나무는 똑같이 서 있다. 손을 떼고 나서도 서늘함이 손끝에 조금 남아 있다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졌다.
이 길에는 소리가 별로 없다. 매미가 울고, 이따금 자전거 바퀴가 지나고, 그게 전부다. 자전거는 뒤에서 소리로 먼저 오고, 지나가고 나면 그 소리가 앞쪽으로 옮겨 가 한참 남는다. 젖은 흙 냄새와 풀 비린내, 그리고 이따금 강 쪽에서 밀려오는 바람.
새들도 이 그늘로 드는 모양이었다. 줄기 사이 여기저기서 물까치들이 저희끼리 재잘거리며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다녔다. 소리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중 한 마리가 눈앞 잔가지에 내려앉았고, 가지가 그 무게에 한 번 출렁였다. 이쪽을 보기는 보았다. 그러고는 곧 고개를 돌렸다.
길 끝에는 주황색 문틀이 하나 서 있었다. 문짝은 없고 틀만 있어서, 지나려는 사람은 그냥 지나가면 되었다. 그 너머로도 같은 나무가 같은 간격으로 줄지어 안쪽까지 이어졌다. 얼마 전에 옆 공원까지 길을 새로 이어 붙였다고 한다. 예전에는 여기서 끊겼다. 문틀 앞에 서서 안쪽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같은 나무가 같은 간격으로 이어지니 저 안의 공기도 여기와 다르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섰다. 남은 길은 가을로 미뤄 두었다. 억새를 보러 한 번 더 올라올 참이었다.
하늘로 오르는 계단
나무 그늘이 걸음마다 성겨졌다. 볕이 다시 목덜미에 얹히기 시작하더니, 어느 지점에서 잎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하늘이 한 뼘 트였다. 그 틈에 강철 송전탑이 서 있었다. 뒤로 뭉게구름이 낮게 부풀어, 회백색 철골이 구름 위에 얹힌 것처럼 보였다. 가로대마다 흰 애자가 구슬처럼 꿰여 있었다. 거기서 나온 선이 하늘을 여러 갈래로 비스듬히 가르며 좌우의 잎 속으로 들어갔다. 선이 어디까지 가는지는 잎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철제 계단은 초록 비탈을 지그재그로 꺾어 가며 올라갔다. 굽이를 몇 번 도는지 세다가 넷쯤에서 그만두었다. 세는 것을 그만두자 대신 숨이 시간을 쟀다. 난간은 볕에 데워져 있어서 짚었다가 이내 손을 뗐다. 열 계단쯤부터 종아리가 뻑뻑해졌고, 등줄기를 타고 땀이 한 줄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고, 숨이 두 계단에 한 번씩 끊겼다. 밟는 자리마다 철판이 낮고 둔하게 울렸다. 마주 내려오는 사람이 있으면 한 칸씩 비켜섰고, 그때마다 서로 짧게 목례를 했다. 굽이마다 같은 각도와 같은 소리가 되풀이되었다.
중간 참에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걸어 나온 메타세쿼이아 길이 어느새 저 아래에 누워 있었다. 오르는 동안 소리가 한 겹씩 걷혔다. 매미가 멀어지고, 도로 소리가 멀어지고, 나중에는 제 숨소리와 철판 울리는 소리만 남았다.
계단이 끝나는 자리에 전망 데크가 놓여 있었다. 그 곁 나무 그늘로 벤치가 몇 개 늘어서 있길래, 어느 것이 나은지 고르지도 않고 가장 가까운 데에 앉았다. 능선을 넘어온 바람이 등의 땀을 훑어 갔다. 젖은 셔츠가 살갗에서 떨어지면서 등이 한 번에 서늘해졌고, 그제야 숨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앉고 나서야 종아리가 얼마나 굳어 있었는지 알았다.
풍력발전기가 어느새 눈높이에 와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저것은 한자리에 서 있었을 뿐인데 이만큼 커졌다.
정상, 은빛을 앞둔 풀밭
벤치에서 일어나 풀밭 쪽으로 걸어 나갔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눈은 발밑과 난간에 묶여 있었는데, 그 좁던 것이 여기서 한꺼번에 풀렸다. 한동안 어디를 봐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사방이 억새였다. 억새라고 하면 으레 은빛을 떠올리게 되는데 눈앞의 것은 허리께까지 오는 초록이었고, 그 초록이 능선을 넘어 너머까지 이어졌다. 하늘도 넓었다. 가리는 건물도 나무도 없어서 보이는 것의 위쪽 절반이 통째로 하늘이었다. 고개를 들 필요가 없었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초록이 한쪽으로 누웠다. 능선 건너편에서 시작한 것이 이쪽까지 오는 데 시간이 걸려서, 오는 것을 먼저 보고 나서 얼굴에 닿기를 기다릴 수 있었다. 풀 스치는 소리는 그보다 더 뒤에 왔다. 풀밭을 가로지르는 사람 둘이 초록에 반쯤 잠긴 채 걸어갔고, 저 끝에 풍력발전기가 서 있고, 그 너머로 도시가 낮게 잦아들었다.
메마른 흙에서도 뿌리를 놓지 않는 풀이라 이 자리에 심었다고 한다.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세상이 초록 몇 겹으로 좁아지고 그 사이로 하늘이 조각조각 끼어들었다. 볕에 데워진 젖은 잎에서 미지근한 냄새가 올라왔다.
허리를 펴자 능선 너머로 구름이 보였다. 아침에 본 것이 그새 더 자라, 위쪽이 흰 덩어리로 솟아 있었다. 저런 것이 오후에 한 번 무너진다. 가방을 열어 우산이 있는지 확인하고 다시 닫았다.
풀밭 너머 멀리 흰 굴뚝 하나가 곧게 솟아 있었다. 억새는 능선 끝까지 초록으로 쓸리는데 저 원통만은 바람에 꿈쩍하지 않았다. 저기서는 지금도 이 도시가 내놓는 것을 태운다.
볕뿐인 풀밭 사이사이에 큰 나무가 몇 그루씩 모여 그늘을 드리운 데가 있다. 그 아래로 들자 이마의 열이 먼저 내려갔다. 정상의 바람이 나무에 걸려 한 겹 눅어졌고, 대신 매미 소리가 촘촘해졌다. 그늘마다 앉을 것이 놓여 있었다. 가운데 정자가 하나, 그 둘레로 벤치가 여럿, 조금 떨어진 나무 아래에는 그네도 걸려 있었다. 빈자리는 거의 없었다.
정자 마루 안쪽에는 나이 든 이들이 신을 벗고 둘러앉아, 억새가 올해는 늦다느니 작년 이맘때는 벌써 셌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말이 오갈 때마다 대는 해가 조금씩 어긋났는데 아무도 바로잡지 않았다. 부채가 한 번씩 움직이면 그 앞의 공기만 잠깐 일렁였다. 그네에는 젊은 둘이 나란히 앉아 휴대폰 하나를 같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방금 찍은 것을 넘겨 보는 모양이었다. 한 사람이 무언가 말하면 다른 사람이 웃었고, 그때마다 그네가 조금씩 흔들렸다. 한 그늘 안에서 한쪽은 작년 이맘때를 보고 있었고 한쪽은 십 분 전을 보고 있었다.
빈 벤치를 하나 찾아 앉았다. 잠깐만 쉬려고 했는데 일어설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그늘에서 나오자 더위가 도로 얹혔다. 서너 걸음 만에 이마에 땀이 다시 맺혔다. 능선을 가득 채운 초록 사이사이, 벌써 이삭을 밀어 올린 포기가 섞여 있었다. 먼저 팬 쪽은 이미 물기를 잃어 마른 잿빛이었다. 온 언덕이 여름인데 그 몇 포기에만 여름이 닿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도 시들지는 않아서, 바람이 오면 초록과 같은 방향으로 함께 누웠다.
오솔길 저편에서 흰 강아지 한 마리가 종종거리며 다가왔다. 더위에 혀를 길게 빼고 헐떡이면서도 발놀림에는 신이 잔뜩 올라 있었다. 억새가 저보다 키가 커서 작은 몸이 풀에 잠겼다가 두어 발짝 뒤에 다시 떠올랐고, 그때마다 흰 머리가 초록 위로 떴다 가라앉았다. 뜬 자리와 잠긴 자리를 눈으로 이어 가며 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곁을 지날 때까지 네 발이 내내 바빴다. 지나가면서 고개를 한 번 들었을 뿐 걸음은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갈 데가 아주 많은 얼굴이었다.
길가에 선 억새 한 포기에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삭이 막 벌어지는 참이었다. 아직 대부분 초록인데 몇 올만 어느새 세어서, 바람이 지날 때 그 몇 올만 다른 빛으로 뒤집혔다. 손바닥을 옆에 가만히 대 보았다. 바람이 오자 이삭 끝이 손금을 한 번 스쳤다. 까끌한 감촉이었다. 이런 것은 뭐라고 불러야 하나. 초록이라고 하기에는 희끗하고, 은빛이라고 하기에는 이르다.
가을이 깊어지면 이 길은 사람으로 메워진다고 한다. 그 북새통은 아직 멀었다. 지금은 풀 스치는 소리가 사람 소리에 묻히지 않는다. 은빛이 오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도 이 소리다.
머리 위에서 날개가 돌고 있었다. 조금 전 억새를 눕히던 바람이 여기서는 날개를 민다. 날개 끝은 순식간에 눈앞을 지나가는데, 도는 것 자체는 이상하리만치 느려 보였다. 가까이 서니 소리가 들렸다. 크지는 않고, 낮게 밀리는 소리가 한 박자씩 끊겼다 이어졌다. 풀밭 가운데서는 들리지 않던 소리다.
하늘공원이라고 세로로 새긴 큰 비석이 서 있었다. 그 앞을 지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걸음을 멈췄다. 비석을 등지고 서서 한 장 찍고는 다시 가던 길로 갔다. 한 무리가 빠지면 곧 다음 무리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이름이 새겨진 돌 앞에서는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서울
풀밭이 끝나는 가장자리까지 걸어 나갔다. 몇 걸음 만에 지면이 발밑에서 뚝 떨어졌다. 가리는 것이 하나도 없는 자리였고, 바람이 곧장 얼굴에 닿았다. 저 아래로 한강이 넓게 누웠다. 물 위에는 붉은 성산대교와 그 옆의 월드컵대교가 나란히 걸렸고, 강은 두 다리를 지나 도시 사이로 멀리 빠져나갔다. 이 높이에서는 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보고 있으면 움직이는 것은 다리 위의 차뿐이다.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월드컵경기장의 흰 지붕이 크게 봉긋하다. 그 뒤로 상암의 높은 건물들이 고만고만한 높이로 이어지고, 더 멀리 남산 꼭대기의 탑이 가늘게 섰다. 저 지붕과 이 언덕은 같은 무렵에 생겼다.
바로 아래로는 공원과 이름을 나눠 가진 아파트 단지가 붙어 있다. 눈을 내리면 흰 동들이 반듯하게 줄지어 서다 문득 끊기고, 그 끝에서 북한산 바위 능선이 거칠게 일어섰다.
한쪽으로는 건물보다 나무가 많다. 숲을 인 언덕이 부드럽게 굽이지고 그 품에 낮은 건물 한 채가 반쯤 들어앉았다. 며칠 내린 비에 공기가 씻겨서, 멀리 있는 것들의 윤곽까지 가까운 것처럼 또렷했다. 거리가 잘 가늠되지 않았다.
둘레길에는 전망대가 곳곳에 놓여 있어서 지날 때마다 자꾸 멈춰 서게 된다. 내려가기 전에 강 쪽으로 한 번 더 눈을 두었다. 물 건너 여의도의 높은 건물들이 무리 지어 섰고, 그 틈에서 오래된 금빛 건물 하나가 여태 도드라졌다. 발치에는 강을 낀 너른 둔치가 초록으로 누워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눈에 담기는 것은 늘 그중 일부다. 몇 걸음 걷다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언덕을 오르내리는 맹꽁이
정상에서 조금 내려서자 풀밭이 물러나고 나무 우거진 넓은 포장도로가 트였다. 억새 사이 오솔길과는 결이 다른, 차 한 대가 넉넉히 지날 만한 길이다. 발바닥에 닿는 것이 흙에서 아스팔트로 바뀌자 걸음 소리가 도로 살아났다. 그 길로 흰 전동차가 아래에서 느릿느릿 올라왔다. 모터 소리가 굽이 너머에서 먼저 도착했고, 차는 그보다 훨씬 뒤에야 모습을 보였다. 지붕만 얹은 열린 차체에 사람 몇이 앉아 있었는데, 걸어 오르는 사람과 속도가 엇비슷해서 탄 쪽이나 걷는 쪽이나 나란히 비탈을 올랐다.
계단을 마다한 사람을 땀 한 방울 없이 정상까지 데려다주는 차다. 표는 얼마 하지 않는다. 그래도 내려가는 길은 걷기로 했다. 저 차를 타 버리면 오늘 하루가 너무 빨리 끝날 것 같았다.
차의 이름은 맹꽁이 전동차다. 맹꽁이가 원래 이 일대에 살았다고 들었다. 도시가 들어서며 물가를 잃고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언덕이 공원이 되고 흙 위에 물웅덩이가 생기고 나서 도로 돌아왔다고 했다. 맹꽁이는 밤에 운다. 이름은 이렇게 사방에 붙어 있는데 정작 울음은 한 번도 듣지 못한 채 내려가게 된다. 밤이 되면 저 풀밭 어디에선가 그 소리가 날 것이다.
숲을 지나 내려오는 길
손님을 정상에 부려 놓은 차가 빈 채로 언덕을 되짚어 내려갔다. 굼뜬 것에 굼뜬 이름이 붙었으니 어울리기는 한다. 그 빈 차가 아래로 작아지는 것을 보고 나서 반대쪽 숲길로 들어섰다. 벽돌 깔린 길 위로 가지가 맞닿아 터널을 이루었고, 등을 데우던 볕이 그 어귀에서 뚝 걷혔다. 내리막이라 종아리 대신 무릎에 무게가 실렸다. 올라올 때 한 겹씩 걷히던 소리가 내려가는 동안 한 겹씩 돌아왔다.
난간에 작은 팻말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뱀을 조심하라는 그림이었다. 이렇게 잘 닦인 산책로에 설마 싶었지만, 없는 일을 두고 팻말을 걸어 둘 리는 없다. 그 뒤로는 길옆 풀숲에 자꾸 눈이 갔다. 맹꽁이는 사람이 불러서 돌아왔고, 뱀은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목록에 없던 것들이 제 발로 들어와 산다.
숲을 빠져나오자 넓은 포장길이 다시 트였다. 맹꽁이가 굴러 오르내리던 그 길이다. 회화나무 꽃이 바닥에 촘촘히 떨어져 노랗게 어룽졌고, 저 아래로 차단기 하나가 보였다. 내리막은 거기쯤에서 끝날 참이었다.
길 옆 숲으로 볕이 비스듬히 들어 나무 밑동마다 빛과 그늘을 잘게 흩어 놓았다. 굵은 줄기들이 낮은 비탈을 덮은 그 안은 한낮인데도 조용했다. 발소리를 멈추자 어디선가 나는 물소리 하나만 이상할 만큼 또렷해졌다. 흙 아래에 무엇이 묻혀 있든 위로 자란 나무들은 여느 숲의 나무와 똑같이 우거졌다. 뿌리가 어디까지 내려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위에서 걷는 동안에는 한 번도 떠오르지 않던 생각이었다.
평지에 가까워지자 길에 사람이 부쩍 늘었다. 달리는 사람이 많았다. 혼자 오는 쪽과 둘이 나란히 오는 쪽이 번갈아 지나갔고,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도 끊이지 않았다. 고른 숨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고, 스쳐 갈 때마다 짧게 바람이 일었다. 발소리는 저마다 다른데 간격은 다들 비슷했다. 그 사이로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도 가볍게 뛰었다. 뛰는 쪽은 사람인데 앞장서는 것은 강아지 쪽이었다. 하루를 잡고 올라오는 것은 위쪽 억새밭까지고, 이 아래는 날마다 같은 자리를 도는 사람들의 길이다.
길은 돌담을 끼고 완만하게 굽어 돌았다. 담 위로 관목이 빽빽하고, 건너편에서는 큰 나무들이 가지를 길게 뻗어 길 위쪽을 거의 다 덮었다. 노면에는 노란 선이 또렷했고, 가장자리에는 걷는 사람이 다닐 띠가 따로 깔려 있었다. 굽이 너머가 담에 가려서, 마주 오는 발소리가 사람보다 먼저 도착했다. 곧 흰 옷 둘이 나란히 달려 나왔다. 그늘이 끊기지 않고 굽이가 완만해서, 한여름 낮에도 여기라면 달릴 만하겠다 싶었다.
언덕을 다 내려와 마지막으로 하늘을 보았다. 아침의 그 구름이 여태 부풀어 있었다. 오후가 되도록 끝내 무너지지 않았고, 가방 속 우산은 하루 종일 접힌 채였다. 쓰려고 챙긴 것을 한 번도 쓰지 않고 돌아오는 날이 있다.
올라간 계단과 내려온 길이 서로 다른 길이었다. 같은 언덕을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 오른 쪽과 내린 쪽이 이어지지 않아서, 들어간 데와 전혀 다른 데로 나온 것 같았다. 접힌 우산, 마르지 않은 신, 등에 밴 소금기. 몇 달 뒤면 이 초록은 통째로 세어 은빛이 되고, 그 물결을 보러 온 사람들이 오늘 걸은 길을 가득 메울 것이다. 아마 그 틈에 섞여 다시 올라오게 될 것이다. 그때도 발밑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는 모른 채로 그 위를 걷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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