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중앙박물관, 장마 속에서 가장 느리게 흐르는 하루
며칠째 비가 이어졌다. 우산 하나로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고, 하루 이틀에 그칠 비도 아니었다. 그런 날 결국 찾게 되는 것은 지붕이다. 되도록 크고, 오래 머물러도 괜찮은 지붕.
이촌역 개찰구 앞에 서서 우산을 접고 물기를 몇 번 털어냈다. 우산이라는 물건은 아무리 정성껏 털어도 어딘가에 물기가 남는다. 세상에는 그런 종류의 물건이 몇 가지 있다. 적당한 데서 타협하고 걷기 시작했다. 이런 계절의 서울에서 가장 넉넉한 지붕이 그 역의 지하보도 끝에 있기 때문이다.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은 물론 한둘이 아니었다. 개찰구를 나서자 2번 출구 쪽으로 향하는 인파가 자연스레 한 줄기를 이루었고, 곳곳에서 낯선 억양이 섞여 들렸다. 이 피난처는 서울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벽과 표지판마다 박물관 안내가 붙어 있어서 길을 물을 일은 없었다. 통로의 벤치에서는 누군가 화면을 들여다보며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곁 유리벽에는 이런 한 줄이 적혀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연중 휴관일 없이 문을 엽니다. 장마철의 도시에서 이보다 미더운 약속은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박물관나들길이라는 지하보도가 역에서 박물관 어귀까지 이어진다. 천장의 조명 패널이 하늘 대신 네모난 빛을 고르게 내려놓고, 무빙워크는 걸음보다 반 박자 느리게 흐른다. 그 속도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서둘러야 할 이유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고, 생각해 보면 애초에 서두르지 않으려고 온 길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마주 오는 사람이 있었고, 손잡이에 나란히 기대선 둘이 있었고, 머리 위로는 박물관 쪽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걸려 있었다. 우산에 남은 물기, 낮은 웅웅거림, 포개지는 발소리. 긴 통로를 지나는 동안, 세계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중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박물관은 전시실보다 한참 앞서, 이 지하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거울못과 열린마당
통로가 끝나고 계단을 오르자 비 냄새가 돌아왔다. 미지근하고 축축한, 7월의 공기. 잠깐 잊고 있었을 뿐인데 아주 오랜만에 맡는 냄새처럼 느껴졌다.
거울못에는 빗소리가 가득했다. 빗방울이 닿을 때마다 수면에 동그란 무늬가 겹겹이 어렸다가 지워졌다. 못가의 청자정 기둥 사이에 앉으면 비를 그으며 못을 내다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누군가 먼저 정자에 들어가 정확히 그렇게 했다. 비에 젖은 기와의 비색은 마른 날보다 한층 짙었고, 정자 안의 시간은 무늬가 번지는 속도로 흘렀다. 같은 박자에 맞춰 잠깐 서 있다가 다시 걸었다.
계단참에 올라서자 건물이 비로소 제 크기를 드러냈다. 길게 누운 화강암 덩어리의 한복판이 통째로 비어 있고, 열린마당이라 부르는 그 빈 곳으로 잿빛 하늘이 통과하고 있었다. 한옥의 대청마루를 건물 크기로 키운 설계라 지붕은 있는데 벽이 없다. 마당을 건너는 동안 바람이 비 냄새를 몇 번이고 새로 실어 왔다.
맑은 날이면 이 사각의 액자에 남산타워가 정면으로 걸린다고 한다. 그날은 안개가 풍경을 반나마 지워 놓아서 타워는 윤곽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계단 위 난간에 우산을 내리고 서서 그 흐려진 풍경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들 틈에 끼어 한동안 같은 쪽을 바라보았다. 잘 보이지 않는 것을 굳이 바라보는 일에도 아마 나름의 이유가 있다. 너른 돌바닥에는 빗소리만 낮게 깔렸다.
문턱 없는 문과 역사의 길
상설전시관의 유리문을 밀자 서늘하고 마른 공기가 끼쳐 왔다. 조금 전까지의 세계와는 다른 종류의 공기였다. 문 안쪽에 있는 것은 가방 검사대뿐이다. 매표소도 개찰구도 없고, 표를 확인하는 사람도 없다. 다들 검사대 앞에서 우산을 한 번씩 털고는 그대로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우산을 한 번 더 털고, 그 흐름에 섞였다.
상설전시는 오래전부터 줄곧 무료였다. 무료라는 것은 생각보다 큰 말이다. 본전을 뽑아야 한다는 계산이 문 앞에서 지워지고, 비가 오면 비를 피하러, 시간이 남으면 시간을 흘려보내러 들르면 된다. 근래 들어 요금표를 달자는 이야기가 박물관 안팎에서 오간다지만, 아직은 무료의 계절이다. 도시에 이런 장소가 하나쯤 있다는 건 꽤 괜찮은 일이다. 괜찮다는 말로는 조금 모자라지만.
로비를 지나면 건물 반대편 끝까지 일직선으로 뚫린 통로가 나온다. 역사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좌우로 전시관들이 겹겹이 붙어 있고, 머리 위는 유리 천장이다. 지붕의 반사경이 태양을 따라 돌며 빛을 실내로 꺾어 들인다고 하는데, 흐린 날의 빛은 흐린 대로 은은했다. 말소리와 발소리는 높은 천장으로 올라가 흩어졌다. 이만한 사람이 내는 소리치고는 묘하게 낮고 둥근 소리였다.
길 가운데에는 우리들의 밥상이라는 특별전의 배너가 서 있었다. 시간이 넉넉하면 들를 생각이었지만 상설전시만 해도 하루에 다 돌기 어려운 크기라, 특별전은 다음으로 미뤘다. 안내 로봇 한 대가 사람들 사이를 미끄러져 다녔고, 그 뒤를 졸졸 따라 걷는 무리가 있었다. 로봇이 방향을 틀면 다들 같이 방향을 틀었다. 그 너머 아득한 끝에 상아색 탑이 하나 보였다. 실내에 선 탑이 점 하나로 보이는 거리. 걷기도 전에 건물의 규모가 몸에 와닿았다.
길 한쪽 벽은 통째로 지도였다. 김정호가 1861년에 펴낸 대동여지도로, 스물두 첩을 모두 펼쳐 이으면 3층 건물 높이의 한반도가 된다. 산줄기는 굵은 선으로 물길은 가는 선으로 그어져 있어서, 벽 하나에 나라 하나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사람들은 차례를 기다렸다가 지도를 등지고 서서 사진을 찍었다. 그 지도 어딘가에는 지금 발 딛고 선 용산도 들어 있다. 나라 안에 서서 나라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어쩐지 이상한 광경이었지만, 그 이상함이 싫지 않았다.
하루에 다 돌 수 없는 크기 앞에서는 순서를 정하는 수밖에 없다. 코스는 오기 전에 정해 두었다. 2층과 3층을 먼저 돌고, 1층으로 내려온다. 좋아하는 것을 뒤로 아껴 두면 정작 그 앞에서 다리가 풀린다는 걸 지난 방문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1층의 전시실들을 지나쳐 탑 곁의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탑의 허리께가 눈높이를 천천히 스쳐 지나갔고, 1층에서 우러르던 기단이 어느새 몸돌이 되어 있었다. 탑 하나를 두고 건물 전체가 나선으로 감아 도는 구조다.
왕의 서고, 초록 비단의 행렬
2층 서화관 안쪽으로 꺾어 들자 조도가 뚝 떨어졌다. 눈이 어둠에 익기를 기다리며 문간에 잠시 서 있었다. 이윽고 그 어둠 위로 금빛 글씨가 떠올랐다. 왕의 서고, 어진 세상을 꿈꾸다. 재작년 늦가을에 문을 연 외규장각 의궤의 전용 전시실로, 달빛이 스며드는 왕의 서고를 본떴다고 들었다.
의궤는, 간단히 말하면, 조선 왕실이 나라의 큰일을 치를 때마다 그 처음부터 끝까지를 글과 그림으로 남긴 기록이다. 정조는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지어 그중에서도 왕이 직접 보던 어람용을 따로 모셔 두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그 서고의 책 340여 권을 배에 실어 갔고, 남은 책들은 전각과 함께 탔다. 실려 간 책들은 파리의 도서관에서 중국 책으로 잘못 분류된 채 오래 잠들어 있었다. 그것을 재불 사학자 박병선이 찾아냈고, 의궤 297책이 145년 만인 2011년에 서울로 돌아왔다. 다만 온전한 반환은 아니어서, 서류상으로는 지금도 5년마다 갱신하는 대여다. 몸은 돌아왔는데 이름은 아직 손님인 책들이다.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과 완전히 되찾는 것 사이의 그 넓은 회색지대를 그 방에서 처음 보았다.
방은 그 책들의 행렬이었다. 실제 외규장각 내부만 하게 세운 기둥과 문살 사이로 의궤 표지들이 벽면 가득 늘어서 있었다. 낮은 백라이트를 받은 표지 하나하나가 어두운 골목에서 올려다본 불 켜진 창처럼 보였다. 창마다 나라의 큰일이 하나씩 들어 있었다. 왕의 혼례, 왕비의 장례, 대비의 회갑, 궁궐의 수리.
안으로 들수록 통로는 조금씩 좁아졌다. 왕실 행렬을 그린 반차도의 질서를 빌린 설계다. 목소리는 저절로 낮아졌고, 사람들은 발소리를 죽인 채 폰을 들어 그 벽을 찍었다. 어느 가방에는 스누피 인형이 매달려 흔들렸다. 백육십 년 전에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책들과 스누피가 같은 어둠을 나눠 쓰고 있었다. 그 조합이 마음에 들었다.
가까이 서면 표지마다 세로로 붙은 흰 제첨의 한자가 또렷했다. 진열장 속 진본 어람용은 초록 비단 표지에 우윳빛 종이, 붉은 선 위의 반듯한 해서, 놋쇠 국화 못. 왕 한 사람을 위해 만든 책이다. 한 번에 여덟 책씩만 꺼내 놓고 석 달마다 바꾼다고 했다. 145년을 기다린 책들에게 석 달이 어느 정도의 시간일지, 짐작할 도리가 없었다.
사유의 방, 두 개의 미소
같은 층 맞은편, 사유의 방으로 드는 복도는 길고 어두웠다. 벽에서는 흑백의 영상이 흘렀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되고 수증기로 흩어지는, 물질의 순환에 관한 영상이다. 하필 장마의 한복판에 보는 물의 일생이었다. 오전에 우산 끝에서 떨어지던 빗방울이 자연히 겹쳐 떠올랐다.
복도는 바깥의 소음을 한 겹씩 걸러 냈다. 깊은 우물을 천천히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끝에 다다를 즈음에는 눈도 귀도 어둠에 맞춰져 있었다. 그다음은 냄새였다. 붉은 흙과 숯에 계피를 섞어 발랐다는 벽에서, 오래된 한약방 서랍 같은 냄새가 건너왔다.
그리고 방이 열렸다.
천장에는 길이가 조금씩 다른 금속 봉 2만여 개가 매달려 있었다. 허공에서 그대로 멎은 빗줄기였다. 바닥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기울어 올라서, 다들 오르막인 줄도 모르고 오르며 저절로 느려졌다. 방 한가운데 낮은 타원의 단 위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쪽 다리를 무릎에 얹고 손끝을 뺨에 댄 채, 오래전부터 그 자세 그대로인 반가사유상이다. 설계자는 맨 뒷줄에서도 배우의 표정이 보이는 소극장을 떠올렸다고 하는데, 과연 문간에서부터 두 얼굴의 미소가 또렷했다.
오른쪽의 상은 세 개의 봉우리를 잇댄 낮은 관을 쓰고 있다. 두 눈은 내리감겼고, 입가에는 미소라 부르기에는 옅고 무표정이라 부르기에는 따뜻한 무엇이 걸려 있다. 아주 먼 곳에서 걸려온 전화를 이제 막 받으려는 사람의 표정 같다고 생각했다. 천사백 년째 벨이 울리는 중이고, 그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는다. 뺨에 댄 손가락은 누르는 것도 받치는 것도 아니게 가볍다. 생각이 가장 깊어지는 순간의 손이 어떤 모양인지, 7세기의 장인은 아마 알고 있었다.
왼쪽의 상은 해와 초승달을 얹은 화려한 보관을 썼다. 관의 형식은 멀리 페르시아의 왕관에서 왔다고 한다. 비단길을 다 건너와 이 얼굴 위에서 멈춘 장식이다. 꽤 긴 여행이다. 검푸른 청동 살결 위로 금빛이 군데군데 남아, 조명 속에서 두 시절의 색이 함께 어른거렸다.
방에는 설명문이 한 장도 없다. 유리도 없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천사백 년이 앉아 있는데, 아무도 손을 뻗지 않는다. 그 한 뼘의 공기가 유리보다 단단하다.
사람들은 타원의 단을 따라 천천히 돌면서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등과 옆모습까지 살폈다. 덩달아 한 바퀴를 돌았다. 등 뒤에서 보면 두 상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뒷모습만은 오래 같이 산 사이처럼 보였다.
입구에 걸린 문구는 이 방의 사용법이기도 하다.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 우산과 장마와 젖은 신발을 문밖에 두고,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을 천 년 넘게 계속해 온 둘 곁에서는 그쪽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방을 나서는 걸음이 하나같이 들어올 때보다 느린 것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그 속도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전시와 전시 사이
박물관에는 걷는 자리만큼이나 앉는 자리가 많다. 한 걸음에 몇 시대씩 건너뛰는 일은 다리보다 먼저 머리를 지치게 한다. 대리석 벽 아래 벤치에서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방금 본 것들을 이야기로 되새기고 있었다.
높은 돌기둥 아래에서는 둘이 어깨를 붙이고 앉아 말없이 화면만 넘겼다. 접은 흰 우산이 둘 사이에 기대서서 천천히 말라 갔다.
라운지의 붉은 소파에서는 아예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잠든 사람도 있었다. 비 오는 평일인데도 어디에나 사람이 있었지만, 건물이 워낙 커서 쉬는 자리만은 넉넉했다. 지난해에 650만 명이 다녀갔다는 박물관이다. 빗소리가 닿지 않는 실내에서 잠까지 오는 걸 보면, 여기가 튼튼한 지붕 아래라는 사실을 몸이 먼저 믿어 버린 모양이다.
으뜸홀의 곡면 벽 아래로는 긴 돌의자가 벽의 곡선을 따라 휘어 있다. 여백이 큰 벽을 등지고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둘은 어깨를 붙이고, 하나는 조금 떨어져서. 그 넓은 벽에서 셋이 차지한 자리는 아주 작았고, 작아서 오히려 단정해 보였다.
위층 복도는 또 하나의 길이다. 조각공예관을 소개하는 화면 앞을 아이 하나가 지나갔다. 손에는 아직 접은 우산이 들려 있었다. 지붕 아래로 이만큼 깊숙이 들어와서도 손에서 놓이지 않는 물건이 있고, 장마는 그런 식으로 실내에도 표를 낸다. 아래층의 웅성거림은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했고, 발소리 하나하나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닫힌 문도 있었다. 불교조각실 앞에는 그 방문 사흘 전부터 이듬해 1월 말까지 문을 닫는다는 안내가 큼직하게 걸려 있었다. 반년 넘게 이어질 새 단장이다. 사람들은 안내판 속 목조 불상의 얼굴만 잠시 들여다보고 다음 전시실로 향했다. 문 너머의 반년을 생각해 보았다. 아무도 보러 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불상들은 무엇을 할까. 아마 지금까지 해 오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을 하겠지, 하고 결론을 내렸다.
난간에서 내려다보는 역사의 길은 걸을 때보다 더 길어 보였다. 아래에서는 흩어지기만 하던 말소리가 이 높이에서는 한 겹으로 뭉쳐 올라왔고, 물빛 영상을 두른 미디어 기둥 곁으로 작아진 사람들이 오갔다.
다리가 무거워질 때쯤, 복도 끝에서 번져 오는 커피 향. 사유공간이라는 찻집이 나왔다. 나무 벽에는 반가사유상과 십층석탑과 향로가 문양으로 걸려 있었다. 커피를 한 잔 마시며 비 구경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주문 기계 앞의 줄이 전시실의 어느 줄보다 길었다. 커피를 단념하고 계속 걷기로 했다. 복도를 채운 향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쉰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것은 커피를 마시는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이지만.
달항아리의 방
3층의 분청사기·백자실로 올라갔다. 조선 도자 오백 년이 한 동선으로 이어지는 방들이다. 그 한가운데에 방 속의 방이 하나 더 있다.
어두운 독방에 백자 항아리 한 점, 그 위로 푸른 보름달 영상 하나. 그게 전부다. 그런데도 방은 조금도 비어 보이지 않았다.
높이와 몸통 폭이 거의 같은 둥근 몸은 완전한 원이 아니다. 굽는 사이 한쪽이 살짝 내려앉아 기울었고, 표면에는 잔금이 가늘게 번져 있다. 완벽한 항아리 같은 건 아마 세상 어디에도 없다. 있다고 해도 그다지 보고 싶지 않다. 그 기울기 때문에, 완벽하게 둥근 어떤 그릇보다 이 항아리가 오래 눈에 남는다. 벽의 달이 몇 번이고 다시 차오르는 동안 항아리는 제자리에서 희게 빛났고, 방에 든 사람들은 약속한 적 없는 침묵을 지켰다.
같은 층의 다른 진열장에는 목에 끈 한 가닥을 드리운 병이 있었다. 철화 안료로 짙게 칠한 병목에서 갈색 끈이 흘러내려, 아랫배께에서 고리 하나로 동그랗게 말려 끝난다. 병목에 매어 쓰던 끈을 아예 그림으로 옮긴 장난이다. 붓 몇 번으로 그은 이 한 줄이 조선 16세기의 솜씨고, 굽 바닥에 새겨진 한글이 훈민정음 이후의 물건임을 일러 준다. 오백 년 전에도 이런 농담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실이 공연히 기뻤다.
전시실 한쪽에는 손으로 보는 달항아리가 놓여 있다. 눈으로만 보던 곡선에 손바닥을 얹어 보라고 내어 준 항아리다. 그 곡선 위에 손바닥을 얹어 보았다. 차고 매끄러운 곡면이 손안에서 천천히 도는 그 감각만은 유리 너머로는 건너오지 않는다. 달항아리는 생각보다 크고, 생각보다 묵직하게 서 있었다. 손을 떼고 나서도 서늘함이 잠시 손바닥에 남았다. 그러고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졌다.
실내에 세운 십층석탑
역사의 길 끝, 미뤄 두었던 경천사지 십층석탑 앞에 마침내 섰다. 고려 1348년에 개성의 절터에 세워진 대리석 탑이다. 이 땅의 석탑 대부분이 화강암인데 이 탑만 무른 대리석이어서, 층층이 새겨진 조각의 결이 돌보다는 상아 세공을 닮았다. 기단에는 현장법사의 여정과 사자와 용과 연꽃이, 위층 몸돌에는 부처의 법회가 빼곡하다. 사람들 틈에서 고개를 젖히자 목이 아파 왔다. 높이 13.5미터.
1907년, 일본의 고관이 황실 혼례의 축하 사절로 왔다가 이 탑을 탐냈다. 마을 사람들이 막아서자 무장한 헌병을 앞세워 한밤에 해체해 실어 갔다. 외국인 언론인들이 그 약탈을 국제 지면에 잇달아 폭로했고, 탑은 11년 만에 돌아왔다. 그러나 훼손이 심해 마흔 해 넘게 경복궁 회랑에 부재로 누워 지냈다. 누워 있는 동안 그것은 탑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긴 돌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마흔 해는 지나갔다.
그 뒤로도 사정은 간단하지 않았다. 1960년에야 경복궁 뜰에 다시 섰고, 산성비에 대리석이 녹아내리자 1995년에 다시 해체되었다. 10년의 보존처리를 거쳐 2005년, 탑은 이 지붕 아래로 들어왔다. 비와 눈을 다시는 맞지 않아도 되는 자리다. 장마의 소리가 유리 천장 밖에서만 아득한 날, 이 탑의 실내살이는 특혜라기보다 요양에 가깝다.
3층 난간에서는 탑을 내려다볼 수 있다. 위에서 굽어보는 일은 절 마당에서라면 허락되지 않았을 시선이다. 지붕돌마다 내려앉은 세월의 결까지 훤히 보였다. 아래층의 사람들은 탑을 축으로 느리게 돌았고, 에스컬레이터가 그 곁을 비스듬히 오르내렸다. 조선 세조 때 탑골공원의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이 탑을 본으로 세워졌으니, 서울 한복판의 두 대리석 탑은 백이십 년 가까운 터울의 형제간이다.
주머니 속의 국보
나가는 길에 가장 붐비는 방은 전시실이 아니라 상품관이다. 뮷즈라는 이름의 박물관 굿즈 브랜드가 으뜸홀 곁에 환하게 불을 밝혀 놓았다. 진열의 정갈함이 웬만한 전시실 못지않고, 문 앞에는 대기 줄을 정리하는 차단봉까지 서 있었다. 만질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하루를 보낸 사람들이, 이번에는 가질 수 있는 것들의 방 앞에 줄을 선다.
매장 안의 공기에는 장마의 눅눅함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문구 코너와 체험 상품 코너 사이가 어깨를 스치는 사람들로 촘촘했고, 사방에서 다른 나라의 말들이 들렸다. 전시실에서는 다들 속삭이던 사람들이 여기서는 목청이 풀려서, 국보 앞에서 쓰지 않고 남겨 둔 말들을 물건 앞에서 몰아 쓰는 것처럼 보였다.
매대 하나가 멀리서부터 노랗게 번져 보였다. 세 봉우리 관을 눌러쓰고 손끝을 뺨에 댄 고양이들, 카카오프렌즈의 춘식이가 반가사유상이 된 인형이다. 조금 전 2층에서 다들 숨을 낮추고 바라보던 그 자세가, 여기서는 한 아름씩 쌓여서 팔리고 있었다.
곁에는 해와 달 보관을 쓴 민트색 라이언이 앉아 있었다. 위층의 두 국보가 나란히 제 인형을 얻었다. 진지한 얼굴로 사유하는 사자 앞에서 웃음을 참는 데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했다. 사유를 그렇게 오래 계속하다 보면 인형이 되는 날도 오는 모양이다.
전통 쪽 매대는 결이 또 다르다. 위층에서 유리 안에 모셔져 있던 형태와 빛깔 들이 여기서는 손닿는 높이까지 내려와 있다. 색색의 종이끈을 감아 만든 방울 장식이 놋쇠 종을 달고 흔들렸고, 지나던 사람들이 그 종을 한 번씩 울려 보고 갔다. 전시실에서라면 경보가 울렸을 일이 여기서는 짧은 종소리로 끝난다.
검은 병 하나는 무관의 전립을 쓰고 있었다. 챙 넓은 모자를 병 머리 크기로 줄인 것으로, 정수리에서는 붉은 술이 흘러내리고 챙 고리에는 색동 구슬 끈이 걸려 있었다. 마시다 만 와인 같은 것을 막아 둘 때 쓰는 뚜껑인 듯했다. 병 하나를 지키는 차림새치고는 지나치게 근사했다.
진열대의 키보드에는 단청을 입힌 키캡들이 칸칸이 얹혀 있었다. 자판 대부분은 기와의 먹빛이나 청자의 옥색처럼 가라앉은 색이고, 화려한 채색은 엔터 언저리에 몰려 있었다. 연꽃과 색동 띠가 겹겹이 오른 품이 대들보 끝의 단청 그대로여서, 하루에도 수백 번씩 눌러 무언가를 결정하는 키가 이 자판에서는 가장 성대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들여다보는 동안은 고궁 처마 밑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손이 지갑이 든 주머니 쪽으로 반쯤 가 있었다. 입장료도 받지 않는 집이 셈은 결국 여기서 치르게 하는구나 싶어서, 그 손을 거두는 데에는 웃음을 참을 때보다 조금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위층의 브랜드 홍보관은 아예 거실을 차려 놓았다. 소파 위에 왕릉 곁을 지키던 돌사람의 얼굴을 본뜬 쿠션들이 기대앉았고, 그 앞에는 흰 반가사유상 인형이 무릎에 새끼 인형을 얹고 있었다. 돌과 금동이 보드라운 감촉이 되어 거실에 놓여 있었다.
로비 한쪽에는 사람 키만 한 반가사유상 인형 한 쌍이 앉아 있다. 반들반들한 금동 대신 벨벳의 살결로, 내리감은 눈매만은 원본 그대로다. 2층에서는 한 뼘의 공기가 유리보다 단단했는데, 여기서는 그 한 뼘이 없다. 다들 그 앞에서 한 번씩 멈춰 사진을 찍고서야 자리를 떴다. 몇 해 전 반가사유상 미니어처가 품절 소동을 일으킨 뒤로 이 박물관의 기념품은 구하기 어렵기로 이름이 났고, 주말 아침이면 상품관 앞에 먼저 줄이 선다고들 한다.
걷다 보면 크고 작은 상품관이 길목마다 하나씩 더 나타났다. 입구 곁에 하나, 전시관 사이에 또 하나. 진열장 안의 원본들은 어디로도 갈 수 없지만, 그 축소판들은 매일 누군가의 가방에 담겨 문을 나선다. 국보는 그렇게 주머니에 들어가는 크기로 조금씩 도시로 흩어져 간다.
산에서 내려온 비석
출구로 향하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멈췄다. 바위 봉우리를 찍은 벽 크기의 흑백 사진 앞에 모서리가 닳은 비석 하나가 서 있다.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손에 넣고 북한산 비봉 꼭대기에 세운 순수비다.
천 년 넘게 그 봉우리에서 비바람을 맞는 동안 무학대사의 비로 잘못 불리기도 했다.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비봉에 올라 이끼 낀 글자를 읽어 내고서야 제 이름을 되찾았다. 더 닳는 것을 막으려 1972년에 산을 내려왔고, 원래 자리는 복제비가 대신 지키고 있다.
사진 속 봉우리 꼭대기에는 마침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돌은 산으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산이 사진이 되어 돌 뒤로 왔다. 천 년 넘게 밤마다 이 돌이 이고 있었을 하늘이 벽 하나에 통째로 붙어 있었다.
젖은 도시로
바깥은 어느새 비가 멎어 있었다. 하루 종일 우산을 쥐고 있던 손이 문득 할 일을 잃었다. 젖은 흙과 풀에서 씻긴 냄새가 옅게 올라왔다. 오전 내내 흐릿하던 남산의 능선이 이제 그 끝에 타워를 가는 선 하나로 다시 세워 두고 있었다. 계단 맨 위에서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댄 채 그 선을 바라보았다. 지워졌던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광경을, 둘은 오래 지켜보았다.
조금 옆 전망 난간에서는 붉은 배낭을 멘 사람이 도시 쪽으로 몸을 기울여 사진을 찍고 있었다. 구름은 여태 하늘을 덮고 있었지만 이음매마다 흰빛이 새고, 그 아래로 용산 일대가 온통 초록으로 젖어 반짝였다. 머지않아 저 물기는 하늘로 올라가 또 한 번 비가 되어 내릴 것이다. 장마란 그렇게, 같은 물이 도시와 하늘 사이를 오르내리는 한 철이다.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처마 밑에 몸을 붙이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광장으로 걸어 나왔다. 방금까지 텅 비었던 돌바닥 위로 접은 우산과 발소리가 흩어지고, 한복판의 큰 나무 아래 벤치에는 한 가족이 자리를 잡았다. 갠 하늘이 오래가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다들 마르는 동안만은 그 아래 나와 있고 싶은 얼굴이었다.
계단을 내려 다시 나들길로 들어섰다. 젖은 세계도, 오래가지 않을 그 하늘도 등 뒤로 한 걸음씩 멀어지고, 날씨를 모르는 밝은 통로만 앞에 남았다. 오늘 곁을 스친 것들은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장마를 이 자리에서 말없이 흘려보낼까. 그 무심함을 조금 나눠 받은 기분으로,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도시를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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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도에서 열기- 행사기간: 연중 개관 (1월 1일, 설날, 추석, 3·6·9·12월 첫째 월요일 휴관)
- 운영시간: 09:30 ~ 17:30 (수·토 09:30 ~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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