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건너뛰기
Seoul.
초안산 수국동산, 한 계단씩 빛깔이 바뀌는 언덕 위 수국
노원구계절초안산 수국동산

초안산 수국동산, 한 계단씩 빛깔이 바뀌는 언덕 위 수국

수국 철이 오면 사람들은 멀리도 떠난다. 누군가는 제주의 바닷가 수국길로, 누군가는 남도의 절집 돌담으로 비행기와 기차를 갈아탄다. 그런데 수유역에서 버스로 몇 정거장, 노원의 야트막한 동산 하나가 6월이면 통째로 수국에 물든다는 건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몇 해 전 노원구가 동산 한 자락을 가꿔 수국을 심었다. 봄이면 철쭉이 피는 이웃 불암산처럼, 여름이면 이 비탈에 수국이 핀다. 아는 사람만 챙겨 찾던 자리가 6월마다 색으로 들어차기 시작했다.

6월의 토요일, 그 색을 보러 동산을 오른다.

꽃문 앞의 코끼리

수유역 1번 출구로 나와 1133번 버스로 갈아탄다. 주말이라 버스 안에는 챙 넓은 모자를 쓰거나 카메라를 멘 사람이 제법 섞여 있다. 몇 정거장 만에 유원극동아파트 앞에 내리면, 길 하나 건너로 곧장 동산 입구가 보인다.

큼직한 흰 글자가 수국동산이라는 이름을 세워 두었을 뿐, 문도 매표소도 없다. 신호가 바뀌자 사람들이 우르르 길을 건너고, 나도 그 틈에 섞여 동네 뒷동산에 마실 나오듯 안으로 든다.

들어서자마자 초록 코끼리 가족이 길을 맞는다. 풀을 촘촘히 입힌 어미가 코를 둥글게 말아 올리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아기 코끼리가 그 어미를 올려다본다.

어미 왼편으로는 흰 철제 게이트가 섰는데, 코끼리와 게이트 사이로 분홍과 파랑 수국이 폭포처럼 쏟아지게 꾸며 두었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코끼리와 쏟아지는 수국 사이로, 들어서기 무섭게 사람들이 북적인다.

게이트 가까이 다가서면, 둥글게 휜 살 위로 수국이 한가득 매달려 꽃 아치를 이룬다. 아이들은 코끼리 다리를 끌어안고, 어른들은 그 아래 들어서서 차례로 사진을 찍는다.

게이트를 지나 몇 걸음 더 오르자, 저 위로 비탈을 통째로 덮은 수국이 눈에 든다.

꽃밭 너머의 도시

눈앞의 비탈을 천천히 오른다. 난간을 두른 길이 나지막한 언덕을 휘감고, 그 굽이마다 흰색과 분홍 수국이 층층이 들어찼다.

조금 오르니 나무 사이로 둘레가 트인다. 꽃밭 끝으로 아파트가 줄지어 섰는데, 발밑은 온통 꽃이고 고개를 들면 그 너머가 도시다. 너른 식물원이 아니라, 동네 뒷동산 하나가 송두리째 꽃이 된 자리다.

오르막은 볕이 따갑다. 6월 한낮의 햇살이 등에 그대로 내리꽂히고, 그늘 한 점 없는 비탈에 더운 기운이 고여 이마에 땀이 밴다.

그럴 즈음 길가 기둥들이 나직한 소리와 함께 희뿌연 안개를 내뿜는다. 더위를 식히라고 세운 물안개다. 안개가 수국 위로 낮게 깔려 햇살을 부옇게 거르고, 그 사이를 지나면 잔 물방울이 얼굴에 닿아 등줄기가 잠깐 서늘하다. 오르막에 달아오른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걸음을 늦추고, 안개 속에서 한 박자 숨을 고른다.

흙이 가른 두 빛깔

안개를 빠져나오면 새하얀 꽃송이가 길을 따라 줄을 잇는다. 아나벨이라는 수국이다. 어른 주먹을 모은 것처럼 둥글게 뭉쳐, 파란 하늘 아래 눈이 부시게 희다.

흔해 보이는 이 흰 꽃에는 백 년 묵은 이야기가 따라온다. 미국의 한 시골 마을, 말을 타고 지나던 여인이 들에 핀 수국에 반해 제 마당으로 옮겨 심은 게 시작이었다. 꽃을 처음 알아본 그 마을 처녀들을 기려 붙은 이름이 아나벨이다. 들에서 우연히 거둔 한 포기가, 지금은 서울의 이 비탈에까지 줄지어 섰다.

흰 아나벨이 끝나는 자리부터 빛깔이 갈린다. 같은 수국인데 한 무리는 분홍으로, 한 무리는 푸르게 핀다.

품종이 달라서가 아니라 발밑의 흙이 달라서다. 땅이 산성이면 뿌리가 알루미늄을 빨아들여 꽃이 파래지고, 그렇지 않으면 분홍으로 남는다. 흙의 산도가 그대로 꽃빛에 드러난다. 발밑이 시면 파랑, 아니면 분홍. 수국을 살아 있는 리트머스 종이에 빗대는 까닭이다.

다만 방금 지나온 흰 아나벨만은 예외다. 파랑도 분홍도 낼 색소가 처음부터 없어, 어느 흙에 심어도 흰빛 그대로다. 흙을 타는 꽃들 틈에서, 백 년 전 들에서 그러했듯 제 흰빛만 지킨다.

그러다 발길을 붙드는 건 따로 있다. 파랗게 겹쳐 핀 별수국이다.

아나벨처럼 큼직하게 뭉치는 대신, 작은 꽃이 별 모양으로 포개져 송이마다 윤곽이 선명하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가장자리의 크고 화려한 꽃과 한복판의 좁쌀 같은 꽃이 따로 논다. 바깥의 큰 꽃은 사실 꽃잎이 아니라 부풀어 오른 꽃받침이고, 진짜 꽃은 안쪽 자잘한 쪽이다.

화려한 헛꽃은 벌과 나비를 안쪽으로 끌어들이고, 진짜 꽃의 짝짓기가 끝나면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등을 돌린다. 할 일을 마치고 조용히 돌아앉는 그 모습에서, 수국의 꽃말은 변심이 되었다.

한두 송이로 보면 단정하던 별수국도, 무리로 펼쳐지면 사뭇 다르다. 비탈 한쪽을 그득 메운 군락 앞에 서면, 작은 별이 수천 송이 모여 잔물결처럼 일렁이고, 젖은 잎과 풀의 풋내가 옅게 끼친다.

나무 그늘이 짙어 한낮에도 빛이 누그러지는 자리라, 그 파랑이 한결 깊다.

그늘이 품은 색

길은 줄곧 나무 그늘을 따라 이어진다. 볕을 피해 걷기 좋은 데다, 그늘이 깊을수록 꽃빛이 외려 짙다.

볕이 들지 않는 안쪽에서도 분홍 수국이 어둑한 초록을 등지고 한층 도드라진다. 환한 데서 본 그 분홍이 맞나 싶게, 그늘에서는 빛이 한결 깊다.

꽃길을 따라 사진 찍기 좋은 자리가 군데군데 놓였다. 흰 원피스를 차려입고 온 사람, 둘이 붙어 셀카를 찍는 연인까지, 다들 가장 좋은 한 컷을 고르느라 같은 화단을 몇 번씩 오간다. 정작 꽃은 가만한데 그 앞만 분주하다.

그래도 아직은 아는 사람만 찾는 곳이라, 사람의 물결에 이따금 틈이 생긴다.

그 틈을 노려 비탈 한가운데로 들어선 누군가가, 파랑과 분홍에 둘러싸여 한참을 나오지 않는다. 줄을 서거나 자리를 다툴 일도 없다. 마음에 드는 꽃밭을 골라 느긋이 머무는, 붐비는 곳이라면 좀처럼 누리기 어려운 호사다.

수국이 덮은 옛 자리

얼마 오르지 않아 비탈 끝, 평평한 마루가 나온다. 나무 그늘 아래로 돗자리를 편 가족, 부채질하는 노인,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까지, 꽃구경 나온 사람과 동네 마실 나온 사람이 한데 섞인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와 두런두런 말소리가 그늘 아래 나직이 고인다. 수국을 보러 왔다기보다, 시원한 그늘에 좀 앉고 싶어 오른 걸음도 적지 않다.

마루 한쪽에는 오래된 정자가 처마를 드러내고 섰다. 기와를 인 지붕이 운치 있게 휘었는데, 세월에 삭았는지 줄을 둘러 출입을 막아 두었다. 들어가 앉지는 못하고 멀찍이서 바라보는 사이, 처마 그늘을 타고 내려온 바람이 목덜미를 스친다.

알고 보면 이 동산은 본래 이름난 옛 묘역이라, 자락 곳곳에 세월 묵은 석물이 흩어져 있다. 발치의 돌 하나에 무심코 눈이 가면, 환한 꽃밭이 실은 오래 묵은 자리 위에 핀 것임을 잠깐 떠올린다.

끝나지 않는 비탈

한숨 돌리고 천천히 돌아 내려온다. 동산 가운데로 자그마한 개울이 흐르고, 그 위에 놓인 나무다리를 사람들이 건너는데, 다리 아래에서는 물레방아가 물을 퍼 올렸다 쏟으며 느리게 돈다. 졸졸대는 물소리가 더운 걸음을 잠시 식힌다.

개울가에는 큼직한 바위를 앉히고 마른 소나무를 곁들였다. 바위틈으로 분홍과 흰 수국이 비집고 피어, 누가 심었다기보다 돌 사이에서 절로 돋은 듯하다.

이제 다 봤나 싶으면, 길을 조금 더 내려가다 또 다른 빛깔의 수국과 마주친다. 분홍으로 물든 무리 뒤로 초가지붕을 인 작은 원두막이 앉았고, 그 안에서 누군가 더위를 식힌다.

이만하면 다 봤다 싶을 때마다 못 보던 빛깔이 나와, 좀처럼 발길이 끊기지 않는다.

마지막 비탈을 내려서는 길목에도 초록 조형물 하나가 분홍 수국에 폭 둘러싸여 섰다. 입구의 코끼리가 배웅이라도 하듯, 꽃이 비탈을 따라 발치까지 쏟아진다.

돌아 나오는 길, 입구의 코끼리 앞은 여전히 사진 줄이 길다. 그 곁으로 장바구니를 든 주민이 무심히 동산을 빠져나간다.

서울 북쪽 끝자락, 멀리 올라와야 닿는 이곳은, 누군가에게는 큰맘 먹고 찾아온 꽃구경이고 누군가에게는 그저 철마다 오르는 뒷산이다. 6월 한 철, 그 두 걸음이 같은 비탈에서 잠깐 겹친다.

찾아가기

초안산 수국동산, 한 계단씩 빛깔이 바뀌는 언덕 위 수국 찾아가기네이버 지도에서 열기
  • 행사기간: 개화 시기: 6월 초 ~ 7월 초
  • 운영시간: 상시 개방
  • 교통: 4호선 수유역에서 1133번 버스로 유원극동아파트 하차 후 도보 5분
이 이야기의 동네노원구 · 이야기 0